작품평론
 Artist voyage-서양화가 김명희 (월간미술 03' 이지은)  
첨부파일 : 없음 글쓴이 : 관리자 / 등록일 : 2012-10-02
                                    

Artist voyage/서양화가 김명희

작가 김명희가 칠판 위에 오일파스텔로 그려내는 구상성 강한 이미지는 일상의 소소한 경험으로부터 멀리 시베리아 벌판을 무대로 무거운 역사의 기억까지 담아내고 있다. 강원도 산골 폐교 작업실에서 남편과 함께 생활하며 작업하는 작가의 작품세계는 회화의 재현에 대한 문제의식과 사회문화적 맥락의 발언까지 포함하고 있다. 유목과 정착사이에서 자신의 삶을 묵묵히 그려가는 작가의 여정을 따라가 본다.

 

경계에서 바라보는 안과 밖

후기식민주의 이론가이자 비평가인 압둘 하메드는 거울상의 경계로서의 지식인을 설명하면서 두 개의 문화에 친숙하지만 그 어느 한 문화에도 속할 수 없거나 속하지 않으려는특성으로 이를 정의하였다. 문화적 이민자들이 이주한 곳의 문화에 순응하는 한편으로 늘 고국의 문화에 대한 향수에 젖어있는 반하여, 거울상의 경계로서의 지식인들은 이질적인 두 문화를 함께 엮어 놓기보다는, 경계에 대한 집요한 분석과 검증을 통해 그 틈새에 새로운 집단을 형성하려 한다. 17년의 외유와 디시 10여 년이 넘는 귀국 후의 시간을 보내고도 여전히 경계를 떠나지 않는 김명희의 작업은 우리와 그들, 나와 타자를 함께 비추는 거울이자 이질적인 분화 사이의 틈새에 자리하는 경첩 같은 존재다.

이번 갤러리 현대에서 열렸던 김명희의 전시 <유전(流轉)의 역동성(Dynamics of Dislocation)전은>을 계기로 그녀의 작품세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1949년생인 김명희는 외교관인 아버지를 따라 어린시절을 일본과 영국에서 보냈다. 귀국 후 이화여고를 거쳐 서울대 회화과에 입학한 그녀는 당시 서구지향적인 미술의 흐름에 역행하여 대학원 졸업논문으로 <화각공예에 나타난 문양화 연구>를 써냈다.

1972년 독일문화원에서의 첫 개인전을 필두로 본격적인 활동에 나섰던 김명희는 이화여고에서 미술교사로 재직하면서 동료이자 그녀의 평생 동반자가 될 화가 김차섭을 만나게 된다. 1975년 김차섭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갔던 김명희는 뉴욕 프랫 인스티튜트 대학원 과정을 수학하고 이듬해인 1976년 김차섭과 결혼하여 소호에 정착했다. 본격적인 작가부부의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김명희는 전업작가의 생활을 접고 생계를 책임지게 되었다. 그저 남편을 위한 뒷바라지 이상의 현실적 이유에서였다. 뉴욕시절을 회상하며 그녀는 역사적인 안목을 바탕으로 한 김차섭의 그림세계를 아들이라고 한다면 심리적이 세계를 표현하는 김명희의 그림세계는 딸이라고 설명한다. 미국사회속의 동양인으로, 그리고 여성으로, 그녀의 작가로서의 삶은 철저한 타자였다. “뉴욕에서는 아들을 위해 집중했기 때문에 딸은 자생적으로 살아남은 거예요.”라는 그녀의 말에서 우리는 김명희의 작품세계에 깃들인 끈질긴 생명력을 가늠할 수 있다.

17년간의 뉴욕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후 이들 부부가 자리 잡은 터는 맨해튼의 높다란 빌딩들과 좁은 하늘과는 정반대인 강원도 내평리의 한 폐교였다. 댐이 생기면서 침수된 마을의 폐교에서 버려진 칠판과의 만남. 이것은 작가가 생활 속에서 부딪히는 경험의 공간이자 사유와 기억의 흔적이 남아있는 텍스트로서의 공간이다.

<공놀이>에는 수학공식과 숫자들, 낙서처럼 휘갈겨진 이름들, ‘...있을테니까라는 메모 등 흔적으로 남아있는 텍스트위에 김명희가 보여 주는 이미지의 텍스트가 겹쳐진다. 내평리 마을학교에서 수업을 받던 아이들은 이미 어른이 되었을 것이다. 작가는 그들이 떠난 공간을 다른 아이들로 채운다. 칠판은 그 존재론적 조건이 끊임없는 쓰기와 지우기의 반복이다. 칠판이 담아내는 기억들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켜켜이 흔적으로 자리하고 그 위에 쓰이는 작가의 이야기는 남아있는 기억들을 고스란히 보듬은 채로 또 어느 날엔가 덧 쓰일 이야기를 잉태하고 있다.

<퍼즐>에서 보이는 글자 카드들(‘’, ‘지워질’, ‘칠판’, ‘그림)과 함께 화면에서 우리를 응시하는 여자아이의 뒤편에 보이는 입방체와 모래시계 모양의 도형을 통해 작가는 전통적으로 회화가 구사하는 공간과 시간의 압축을 드러내는 동시에 다양한 조합의 가능성을 내포하는 과정으로서의 회화를 제시한다. 이미지가 담아내는 시간의 층위는 비디오와 회화가 만남으로 한층 더 본격화 된다.

<내가 결석한 소풍날>은 음악용 칠판위에 적혀있는 음표들 중앙에 설치된 LCD 모니터를 통하여 노란 단풍잎 속에서 벌어진 아이들의 소풍을 담고 있다. 작가는 어린시절 자주 놓쳤던 소풍에 대한 안타까움을 영상으로 대신했다. 금방이라도 아이들의 노랫소리가 들릴 것 같은 이 작품은 <김치 담그는 날>과 더불어 작가의 가장 개인적인 고백이다.

 

일상과 역사에 대한 깊은 성찰

한편 <>에서 작가는 마을 이장의 갓난아기를 그린 그림과, 화면 옆에 마련한 만화적 상상의 공간에 이제 훌쩍 자란 그 아이가 어릴 적 모습을 그린 그림을 신기한 듯 쓰다듬는 장면을 촬영한 비디오를 나란히 병치함으로써 마치 장자의 나비 꿈같은 데자부를 시도한다. 비디오의 화면에는 영상과 회화 이미지를 꿰뚫는 작가의 화두가 떠오른다. “환영주의의 환영?’ 회화의 재현과 비디오의 재생이 표방하는 차이를 일순간 뒤바꾸어 놓는 김명희의 재치는 그녀의 작품을 결코 감상주의적으로 해석할 수 없게 하는 작가의 날카로운 이성의 표현이다.

김명희가 제기하는 재현에 대한 문제의식과 사회적 맥락의 발언은 일견 평범한 재현으로 보이는 <북에서 온 아이><남동에서 온 아이>에서도 드러난다. 마치 일란성 쌍생아를 보는 듯한 이 두 아이(실제로 동일한 한 아이의 슬라이드로 확대하고 좌우를 바꾼 것)는 푸른 색조의 옷과 붉은 색조의 옷이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같아 보인다. 그러나 이 쌍의 아이그림은 김명희의 다른 작품 <보트 피플>에 등장하는 한 쌍의 한반도 지도와 함께 보게 될 때 결코 범상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보트 피플>은 북에서 귀순한 일가의 도착을 보도하는 뉴스의 한 장면을 확대된 픽셀로 처리한 중앙부의 칠판그림과 양옆 한반도 지도를 그린 칠판 한켠에 설치된 LCD 모니터를 통해 반복되는 시제 뉴스 장면의 영상으로 구성되었다. 양편 비디오의 화면에는 김명희가 삽입한 "Are you ready for me?""Am I ready for you?"가 띄어진다. 반세기에 걸친 남과 북의 분단에 의한 문화적 이질감의 고착화, 경제적 격차 등 통일을 둘러싼 과제를 무겁게 상기시키는 이 발언은 취재진들에 둘러싸여 자유의 품에 안겼다고 기뻐하는 북에서 온 일가의 인사말을 공허하게 한다. 그들이 생각하는 자유와 우리가 줄 수 있는 과연 같은 것일까?

김명희의 칠판 그림은 어느덧 내평리라는 장소성을 넘어서 나라 밖의 경계로 확대된다. 1997년 김명희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서 중앙아시아 깊숙이 한국 강제 이주민의 삶을 추적한다. <강요된 유전>, <사마라칸트의 황금복숭아>,<혼혈>;<추방>등의 작품은 모두 소비에트 시절의 러시아가 시베리아를 통치할 목적으로 1937년에 17만 명의 한인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던 역사의 흔적을 주제로 하고 있다.

<강요된 유전>은 시베리아의 자작나무 숲을 배경으로 한복을 입은 일군의 소녀를 그려냈다. 뿌리 뽑힌 강제이주와 새로운 삶터에 뿌리내린 문화의 혼성은 자작나무라는 식물을 통해 상징된다. 자작나무는 흰 박달나무로도 알려진 북반구에서 널리 서식되는 나무로, 흰색을 내는 나무 표면 때문에 사냥꾼들에게는 밤에 길을 인도하는 신목으로 여겨져 왔다. 활처럼 잘 휘어지지만 부러지지 않는 강인함과 봄이 되면 가장 먼저 움트는 생명력을 가진 이 나무는 실은 우리 민족에게 익숙한 존재다. 단군 왕검의 ()’자 역시 박달나무를 상징한다. 화면 오른쪽 상단의 비디오는 작가가 러시아의 자료보관소에서 찾아낸 시베리아 철도건설장면을 찍은 다큐멘터리와 몽골의 기마병,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 황금빛 기러기를 보여준다. 시베리아의 바이칼 호수에서 찍은 기러기를 합성한 이 장면은 남방을 지향하는 철새의 날갯짓을 따라 두고 온 먼 옛날의 고향을 그리는 이산의 아픔을 표현하고 있다. 휘어져도 쉽게 부러지지 않는 자작나무같이 우리 민족의 뿌리 뽑힌 이산은 시베리아의 먼 땅에 뿌리내린 것이다.

역시 한인 소녀들을 그린 <사마라칸트의 황금복숭아>에는 중앙아시아에서 중국으로, 그리고 한국으로 이어지는 유랑의 여정이 함축되어 있다. 복숭아는 당 나라 때에 중앙아시아에서 다른 향신료들과 함께 중국으로 유입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도연명의<도화원기>의 내용이나 안견의<몽유도원도>등에서 나타나듯 낙원과 치유(영원한 젊음)등의 의미를 가진 이 복숭아는 김명희의 <추방>에서 보이는 화석이 되어가는 노부부의 무기력한 소외를 어루만져 줄 유일한 방편으로 보인다. 그들은 먼 이국땅에서 그렇게 뿌리내리고 그렇게 잊혀 갔다. 작가는 이산의 현실이 동반하는 혼혈의 문제에도 눈을 돌린다. <혼혈>에서 우리는 한복을 차려입고 태극선을 든 러시아계 혼혈여성을 본다. 블라디보스톡에 사는 이 여인은 핏속에 흐르는 한인의 문화를 다소곳한 몸짓으로 환기시킨다.

 

유목과 정착의 경계에서

김명희는 이질적 문화간의 충돌과 혼성에서 새로운 문화공간을 모색하는 것일까? 미국에서의 17년의 세월과 아직도 1년의 3분의 일을 뉴욕의 스튜디오에서 보내는 그녀에게 디아스포라(Diaspora)는 무엇보다 그녀 자신이 몸으로 느끼는 삶의 일부이다. 1980년대 미국 체류시 남편인 김차섭과 함께했던 대륙일주에서 김명희는 봉분문화의 편재성을 실감했다. 특히 오하이오주의 인디언 유적지에서 본 250m에 달하는 거대한 봉분이 준 전율을 그녀는 기억한다. 이런 전율은 봉분문화의 지역들을 연결하는 <봉분축조인 이동로 메타여행>으로 형상화되었다. 작가가 직접 찍은 비디오 화면들과 다큐멘터리 방송에서 발췌한 화면들을 함께 보여주며, 그녀는 미주대륙, 한국, 시베리아, 영국에 걸쳐서 봉분을 만든 고대인의 유적을 추적했다. 바닥에 놓여있는 거대한 칠판에 세계지도를 그려놓고 봉분문화가 발견되는 지명을 표시한 지점들을 이어주는 철로를 설치한 것이다. 실제로 모형기차가 철로 위를 달리게 되어 있는 이 설치작품은 갤러리의 사정상 벽면에 부착되었고 기차는 한곳에 정지된 채 전시되었다. 칠판 위에는 소형 LCD 모니터들이 ‘Silbury Hill', '경주’, 'Cahokia' 등의 지명이 있는 봉분의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미국에서 발견되는 인디언들의 봉분문화 유적들은 인디언 문화를 조직적이며 제도적으로 말살시킨 백인 우월주의가 빚어 온 잔혹한 역사를 상기시키는 비판의 구실을 함께 한다.

봉분의 역사는 이산의 역사이기도 하다. 작가의 설명에 따르면 농경사회에서보다 유목사회의 매장풍속에서 더 많이 나타나는 봉분은 다름 아닌 유목민의 산물이다. 이동에 대한 김명희의 생각은 추석을 즈음하여 벌어지는 민족의 대이동으로 이어진다. 성묘와 추석. 정체성 찾기와 근원으로의 회귀에 대한 본능. 이런 의미에서 <한강둔치 12지신 언덕 프로잭트>라 명명된 가장 최근의 작품은 무덤을 수호하는 12지 신상을 정체성을 찾는 여정의 모퉁이 마다 놓아 보자는 일종의 대지미술에 대한 계획도다. 작가는 차를 타고 한강변을 지나며 그 일률적인 조형에 의미와 형상을 부여하고 싶었다고 한다. 특히 동양의 8궤와 12지를 조합하여 만든 방위들을 가지고 열두 가지 동물상 각각의 방위를 지정하여(예를 들어 쥐는 북동을 가리킨다) 한강다리를 지나며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는 장소를 골라 설치하는 것이다. 각 둔치의 지리적 특성에 따라 해가 뜰 때 가장 먼저 빛이 들어오는 위치까지 계산하여 설치될 이 가상의 프로젝트는 한강이 구비 도는 둔치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봉분으로 삼고 있다. 김명희의 이런 봉분은 과거와 현재, 동양과 서양을 이어주는 기억의 공간이다.

김명희는 내평리의 작업실에서 시베리아를 생각하고, 뉴욕의 공기를 마시면서도 경주에 있는 어느 봉분을 더듬고 있다. 어느 한곳에 안주하지 않는 홈리스의 삶, 이것은 을 갖지 못한 자의 소외가 아니며, ‘을 떠난자의 그리움도 아니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말했듯이 홈리스는 세계를 으로 삼아 그 어디나 집인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삶인 것이다. 이런 홈리스의 삶이야말로 김명희가 택한 구도의 삶이며, 돌아갈 을 두지 않음으로써 세계를 집으로 삼아 아우르는 진정한 디아스포라의 자세이다. 이산과 파종의 문화 속에서, 혼혈과 대립의 갈등에서, 이동의 자취를 추적하는 거대한 지도에서 이어지는 동과 서의 연결부위마다, 김명희가 비추는 거울은 더욱 명징하게 경계의 안팎을 담아내고 있다.

 

이지은/미술사 월간미술 2003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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